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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는 과학적 사실과 상충되는가?
    카테고리 없음 2021. 7. 7. 11:03

    주제 3: 성서는 과학적 사실과 상충되는가?
    by food4life.kr


    1 사람들은 흔히 성서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은 과학에 의해 밝혀진 사실에 대한 신뢰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표면적으로 절대적 존재로서의 창조자를 인정하지 않는 과학과 종교가 쉽게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종교와 과학과의 관계를 숙명적인 대립 관계로 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논란은 '창조냐 진화냐'에 대한 논쟁이다. 이 문제에 대해 논하자면 머리부터 아파온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양측에서 내 놓는 간단치 않은 여러 증거들을 훓어보는 것 만으로도 질려버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리 복잡하지 않은 논리적 검증으로 이들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는 일이 가능하다고 본다.

    2 먼저 과학의 정의부터 생각해 보겠다. 과학에 대해서는 다양한 정의가 나오겠지만 '아메리칸 헤리티지 사전'에는 '관찰, 검증, 서술, 실험에 입각한 연구 그리고 현상에 대한 이론적 해석'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이 정의에 나오는 과학의 본질은, 나중에 검증과 실험의 단계를 거쳐 이론적 토대를 구축하긴 하지만, 결국 '관찰이 모든 과학적 이론의 시발점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인간이 경험한 관찰과 그로 인해 축적된 지식(이후로 '과학'이라고 지칭하겠다.)의 한계를 뛰어넘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예사로이 보아 넘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3 예를 들면, 고도의 과학적 지식의 축적없이는 알 수 없는 것이 그러한 지식이 축적되기 오래전에 기술되었다든가, 또는 과학이 덜 발전되어 잘못된 이론이 받아들여지던 시대에 그러한 시대적 오류를 뛰어넘어 기술된 내용이, 나중에 발전된 과학에 의해 수정된 내용과 일치할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만약 이러한 예들이 하나 둘이 아니라 여러 개라면 동일한 출처의 또 다른 기술 내용이, 아직 발전하고 있는 미완의 학문인 과학에 의해 지금 도외시되고 있다 하더라도 쉽게 덮어버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나중에 과학이 더 발전하면 수긍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4 성서는 과학을 논하는 책은 아니지만 과학적 지식을 부정하거나 무시하지도 않는다. 성서와 과학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성서의 주장대로라면, 인간보다 더 높은 근원인 창조주의 지식을 담고 있는 책으로서 과학은 오히려 성서의 확실성과 신뢰성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도구로서의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겠다.

    5 이제 앞서 예를 든 경우들의 실례를 들어 보겠다. (편의상 출처의 내용을 인용하였다.)

    전염병과 격리에 관한 율법

    6 현대 의학은 질병의 확산과 예방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19세기에, 의학의 진보로 인해 소독―감염을 줄이기 위한 청결―이라는 의학 기술이 처음으로 도입되었습니다. 극적인 결과가 있었습니다. 감염과 때 이른 죽음이 현저하게 감소하였습니다.

    7 하지만 고대의 의사들은 질병이 어떻게 퍼져 나가는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또한 병을 예방하는 일에서 위생이 중요하다는 점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많은 의학 기술들이 현대의 표준으로 볼 때 미개해 보이는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8 현재 볼 수 있는 가장 오래 된 의학 교본 중 하나는 에베르스 파피루스인데, 이것은 이집트의 의학 지식을 모은 편집물로서 기원전 1550년경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파피루스 두루마리에는 “악어에 물린 상처에서부터 발톱 통증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고통스러운 병에 대한 약 700가지 치료법이 들어 있습니다. (참고 문헌: The New Encyclopædia Britannica, Micropædia, 1995, Vol. 4, p. 342.) 「국제 표준 성서 백과 사전」(The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clopaedia)에서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그 의사들의 의학 지식은 순전히 경험에 의한 것이었고, 대체로 주술적이었으며, 전반적으로 비과학적이었다.” (참고 문헌: The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clopaedia, edited by James Orr, 1939, Vol. IV, p. 2393.) 대부분의 치료법은 효과가 전혀 없는 것이었으며, 그 중 일부는 극히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상처 치료와 관련하여 한 처방전에서는, 사람의 배설물과 다른 재료를 섞어서 만든 혼합물을 바를 것을 추천하였습니다. (참고 문헌: Grundriss der Medizin der alten Agypter IV1, Ubersetzung der medizinischen Texte, by H. von Deines, H. Grapow, W. Westendorf, 1958, No. 541.)

    9 이집트의 치료법을 적어 놓은 이 교본은, 모세의 율법이 들어 있는 성서의 첫 번째 책들과 거의 같은 시기에 기록된 것입니다. 기원전 1593년에 태어난 모세는 이집트(애굽)에서 성장하였습니다. (출애굽 2:1-10) 그는 파라오(바로)의 집안 사람으로서, “이집트인들의 모든 지혜로 교훈받았습니다.” (사도 7:22) 그는 이집트의 “의사”들에 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창세 50:1-3) 효과가 없거나 위험한 그들의 의학 기술이 모세가 쓴 글에 영향을 미쳤습니까?

    10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세의 율법에는 시대를 훨씬 앞선 위생 규정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군대의 야영 생활에 관한 법은 진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배설물을 묻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신명 23:13) 이 법은 상당히 진보한 예방책이었습니다. 그것은 물이 오염되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이 되었으며 파리가 옮기는 세균성 이질과 기타 설사병들을 예방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병들은 지금도 위생 상태가 열악한 나라들에서 매년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 가고 있습니다.

    11 모세의 율법에는 그 밖의 위생 규정들도 들어 있었는데, 그러한 규정들은 전염병이 퍼져 나가지 않도록 하여 이스라엘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전염병에 걸렸거나 걸린 것으로 의심이 가는 사람은 격리되었습니다. (레위 13:1-5) 자연적으로(아마도 질병으로) 죽은 동물에 닿은 옷이나 그릇은 다시 사용하기 전에 물로 씻거나 없애 버려야 하였습니다. (레위 11:27, 28, 32, 33) 사체를 만진 사람은 누구나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옷을 빨고 몸을 씻는 일을 포함하여 정결하게 하는 절차를 밟아야 하였습니다. 그런 사람은 7일간의 부정한 기간 중에 다른 사람과 신체적으로 접촉하는 일을 피해야 하였습니다.―민수 19:1-13.

    12 이 위생 규정은 그 당시 주변 나라들의 의사들이 갖지 못했던 지혜를 보여 줍니다. 의학이 질병이 퍼져 나가는 방법에 관해 알게 되기 수천 년 전에, 성서는 질병에 걸리지 않도록 보호해 주는 합리적인 예방법을 규정하였던 것입니다. 모세가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일반적인 수명이 70세나 80세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시 90:10.

    13 당신은 앞에서 언급한 성서의 기록들이 과학적으로 정확하다는 것을 인정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성서에는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그 밖의 기록들도 들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서가 반드시 과학과 상충된다고 할 수 있습니까?

    출처: 「모든 사람을 위한 책」 20-21면

    우주의 시작

    14 우주의 기원에 관하여 성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 1:1) 그러나 많은 과학자들은 그것이 비과학적이라고 여겼었읍니다. 우주에는 시작이 없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천문학자인 로버어트 자스트로우는 보다 새로운 정보를 지적하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기묘한 발달에 있어서 긴요한 점은 우주에는 어떤 의미에서, 시작이 있다는 점, 우주는 어느 시기엔가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자스트로우가 여기에서 지적한 것은 제 9장에 나온, 현재 널리 인정받고 있는 대폭발설입니다. 그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현재 우리는, 천문학적 증거를 따라가 보면 세계의 기원에 관한 성서의 견해에 이르게 됨을 알고 있다. 세부점들은 차이가 있지만, 창세에 관한 천문학 기록과 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내용의 본질적 요소들은 동일하다.” (참고 문헌: God and the Astronomers, by Robert Jastrow, 1978, pp. 11, 14.)

    출처: 「생명 그 기원은 무엇인가? 진화인가, 창조인가?」 제17장 202면 7항

    지구의 형태 1

    15 이 질문은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였습니다. 고대의 일반적인 견해는 땅이 평평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우주가 상자나 방처럼 생겼으며 우주의 밑바닥이 땅이라고 믿었습니다. 인도의 브라만교 사제들은 땅이 평평하며 땅의 한쪽 면에만 사람이 산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아시아의 어떤 원시 부족은 땅을 거대한 차 쟁반으로 묘사하였습니다.

    16 일찍이 기원전 6세기에 그리스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달과 태양이 구형(球形)이므로 땅도 구체(球體)일 것이라는 이론을 세웠습니다. 그 후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4세기)는 그 견해에 동의하면서, 땅이 구형이라는 사실은 월식(月蝕)에 의해 증명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달에 비치는 땅의 그림자가 곡선이기 때문입니다.

    17 하지만 땅이 평평하다는(위쪽 면에만 사람이 산다는) 개념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땅이 둥글다는 사실에 논리적으로 포함되는 개념―대척점 개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대척점(對蹠點)이란 ··· 지구상에서 서로 정반대 위치에 있는 두 장소이다. 이 두 장소를 이은 직선은 지구의 중심을 지나게 된다. 대척점(antipodes)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발에서 발까지를 의미한다. 두 사람이 각각 양쪽 대척점에 서 있을 경우, 두 사람의 발바닥과 발바닥이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게 된다.”―「월드 북 백과 사전」.) 기원 4세기의 그리스도교 호교론자인 락탄티우스는 바로 그 개념을 비웃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추리하였습니다. “사람들의 발자국이 그들의 머리보다 더 높은 곳에 있다고, ··· 농작물과 나무가 아래쪽을 향해 자란다고, 비와 눈과 우박이 위쪽을 향해 떨어진다고 믿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어디에 있는가?” (참고 문헌: The Divine Institutes, by Lactantius, Book III. XXIV.)

    18 대척점 개념은 몇몇 신학자들에게 난처한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어떤 이론들에 의하면, 대척점에 사람이 있다고 해도, 바다가 너무 넓어서 항해할 수 없기 때문에 또는 건널 수 없는 뜨거운 지대가 적도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기존의 인류와 전혀 관련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대척점에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올 수 있었겠습니까? 난처해진 일부 신학자들은 대척점에는 사람이 존재할 수 없다거나 심지어 락탄티우스가 주장한 것처럼 애초부터 땅이 구체일 수 없다고 믿기를 더 좋아하였습니다!

    19 그렇지만 땅이 구형이라는 개념은 퍼져 나가, 마침내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20세기에 우주 시대가 동트고 나서야 비로소 인간은 우주 공간으로 충분히 멀리 여행하여 땅이 구체라는 사실을 직접적인 관찰을 통해 확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 그러면 성서는 이 문제에 있어서 어떤 입장을 취하였습니까? 기원전 8세기에, 땅이 평평하다는 견해가 널리 퍼져 있었을 때에, 그리스 철학자들이 땅이 구형일 것이라는 이론을 세우기 여러 세기 전에, 인간이 우주에 나가서 지구가 구체임을 확인하기 수천 년 전에, 히브리 예언자 이사야는 주목할 만큼 간략하게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그는 땅 위 궁창에[“원 모양의 땅 위에”] 거하시[느니라].” (이사야 40:22, 「신세」 참조) 여기에서 “원 모양”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후그는 “구체”라고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참고 문헌: Gesenius’s Hebrew and Chaldee Lexicon to the Old Testament Scriptures, translated by Samuel P. Tregelles, 1901, p. 263.) 다른 성서 번역판들에도 “지구(地球)”(「두에역」), “둥근 땅”(「모팻역」)으로 되어 있습니다. (덧붙여 말하자면,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원 모양으로 보이는 것은 구체뿐이다. 평평한 원반은 대부분의 경우 원 모양이 아니라 타원 모양으로 보일 것이다.)

    21 성서 필자 이사야는 지구에 대해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던 통념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사야는 과학이 진보하면서 발견한 것들에도 위협받지 않는 내용을 기술하였습니다.

    출처: 「모든 사람을 위한 책」 18-19면

    지구의 형태 2

    22 고대에 사람들은 우주에 관한 그 밖의 질문들에도 당혹스러워하였습니다. ‘땅은 무엇 위에 얹혀 있는가? 해와 달과 별들을 떠받쳐 주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아이작 뉴턴이 체계화하여 1687년에 발표한 만유 인력의 법칙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천체가 사실상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에 매달려 있다는 개념을 알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설명에는 흔히 유형의 물체나 물질이 땅과 그 밖의 천체를 높이 떠 있도록 붙잡아 주고 있다는 개념이 들어 있었습니다.

    23 예를 들어, 아마 섬에 살던 사람들이 처음으로 생각해 낸 듯한 어떤 고대 이론에 의하면, 땅은 물로 둘러싸여 있고 그 물에 떠 있다고 하였습니다. 힌두교인들은 땅에는 여러 층의 기초가 있으며 한 기초가 다른 기초 위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땅은 네 마리의 코끼리 위에 있고, 코끼리는 거대한 거북 위에 있고, 거북은 엄청나게 큰 뱀 위에 있고, 똬리를 틀고 있는 그 뱀은 우주의 바다 위에 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철학자 엠페도클레스는 땅이 회오리바람 위에 얹혀 있으며 이 회오리바람이 천체 운동의 원인이라고 믿었습니다.

    24 가장 영향력 있었던 견해 중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가 있습니다. 그는 땅이 구체라는 이론을 세우기는 하였지만, 땅이 빈 공간에 달려 있을 수도 있다는 견해는 부정하였습니다. 그는 「천체론」(On the Heavens)이라는 논문에서 물이 땅을 떠받치고 있다는 개념을 논박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공중에 떠 있는 것은 땅의 특성이 아닌 것처럼 물의 특성도 아니다. 그것은 다른 것을 떠받칠 수 있는 어떤 물질이어야 한다.” (참고 문헌: On the Heavens, by Aristotle, Book II. 13. 294a, 294b.) 그러면 땅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리스토텔레스는 해와 달과 별들이 견고하고 투명한 천구(天球)들의 표면에 부착되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천구 안에는 또 다른 천구가 있으며, 땅은 그 중앙에―고정되어―있다고 하였습니다. 천구들이 서로 회전함에 따라 천구 위에 있는 물체들―해와 달과 행성들―이 하늘을 가로질러 움직인다는 것이었습니다.

    25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은 논리적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천체들이 어떤 물체에 견고하게 부착되어 있지 않다면, 도대체 어떻게 높이 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존경받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약 2000년 동안 사실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신 브리태니카 백과 사전」에 의하면, 16세기와 17세기에 그의 가르침은 교회의 견지에서 볼 때 “종교 교의의 위치로 격상”되었습니다. (참고 문헌: The New Encyclopædia Britannica, Macropædia, 1995, Vol. 16, p. 764.)

    26 망원경이 발명되면서, 천문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대답을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는데, 아이작 뉴턴 경이 행성들은 빈 공간에 매달려 있으며 보이지 않는 힘―중력―에 의해 궤도를 유지한다고 설명하였을 때까지 그러하였습니다. 이러한 설명은 신빙성이 없어 보였으며, 뉴턴의 일부 동료들도 우주가 대부분 물질이 없는 비어 있는 상태일 수 있다는 점을 믿기 어려워하였습니다. (뉴턴 당시의 지배적인 견해는, 우주는 유체―우주 “용액”―로 가득 차 있으며 유체의 소용돌이 때문에 행성들이 돌고 있다는 것이었다.) (참고 문헌: The Planet-Girded Suns, by Sylvia Louise Engdahl, 1974, p. 41.)

    27 이 문제에 관해 성서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거의 3500년 전에 성서는 대단히 명확하게 땅이 “공간”에 달려 있다고 기술하였습니다. (욥 26:7) 원래의 히브리어로, 여기서 사용된 “공간”(벨리마)이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아무 것도 없는”을 의미합니다. (참고 문헌: A Comprehensive Etymological Dictionary of the Hebrew Language for Readers of English, by Ernest Klein, 1987, p. 75.) 「현대 영어 역본」(Contemporary English Version)에서는 “허공에”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28 “허공에” 달려 있는 행성은 그 당시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땅을 묘사했던 방법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성서 필자는 시대를 훨씬 앞서서 과학적으로 정확한 내용을 기록하였습니다.

    출처: 「모든 사람을 위한 책」 19-20면

    벨사살

    29 벨사살에 관해 밝혀진 모든 고대 자료들이 한때는 성서 내용과 달랐읍니다. 성서에서는 벨사살이 바벨론이 패망할 때의 바벨론 왕이라고 알려 줍니다. (다니엘 5:1-31) 그러나 세속 기록들은, 벨사살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으며, 나보니더스가 그 당시의 왕이었다고 말하였읍니다. 그러므로 비평가들은 벨사살은 존재한 적도 없다고 주장하였읍니다. 그러나 보다 최근에 발견된 고대 기록들은 벨사살이 나보니더스의 아들이며 바벨론에서 그의 아버지와 공동 통치자로 다스렸음을 밝혀 줍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성서에서는 벨사살이 다니엘을 “나라의 세째 치리자”로 삼겠다고 했었음이 분명합니다. 벨사살 자신이 둘째 치리자였기 때문입니다. (다니엘 5:16, 29) 그러므로 예일 대학교의 R. P. 도우어티 교수는 성서의 「다니엘」서와 기타 고대 기록들을 비교해 보고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성경 기록은 탁월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성서가 벨사살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고, 벨사살이 왕권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고, 그 나라에 이인 통치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참고 문헌: Nabonidus and Belshazzar, by Raymond Philip Dougherty, 1929, p. 200.)

    출처: 「생명 그 기원은 무엇인가? 진화인가, 창조인가?」 제17장 211면 28항

    토끼의 되새김질

    32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에는 먹어서는 안되는 부정한 동물들의 목록이 나옵니다. 기본적인 기준은 되새김질을 하고 굽이 갈라져 있는 동물만을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토끼는 되새김질은 하지만 굽이 갈라져 있지 않기 때문에 부정하므로 먹어서는 안된다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성서 비평가들은 토끼는 되새김질을 하지 않는 동물이라고 주장하며 성서의 이 부분을 들어 성서 기록의 부정확성을 꼬집어 왔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18세기 무렵까지 계속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동물 생태학자들의 관찰에 의해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방식과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 결국 토끼도 되새김질을 한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33 성서에 의하면, ‘토끼는 새김질을 한다.’ (레위 11:6) 프랑수아 불리에르 (「포유 동물 박물지」 [The Natural History of Mammals], 1964년, 41면)는 이렇게 말한다. “‘되씹기’ 습관, 즉 음식이 장을 한 번만이 아니라 두 번 지나는 것은 집토끼나 산토끼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인 것 같다. 집토끼는 보통 밤에 주는 먹이를 씹지 않고 삼키는데, 아침에는 그 양이 위의 내용물 전체의 절반이나 된다. 산토끼는 하루에 두 번 되씹기를 하며, 유럽 산토끼도 똑같은 습관을 가진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세계의 포유 동물」(Mammals of the World, E.P. 워커 저, 1964년, 2권, 647면)이라는 책은 이렇게 기술한다. “이것은 반추 동물의 ‘되새김질’과 비슷할 것이다.”

    출처: 「파수대」1992년 5월 15일호 4면 성서가 하나님의 영감받은 선물인 이유

    34 지금까지 몇 가지 예를 들었다. 요지는 이렇다. 과학은 계속 발전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현재의 시점에, 어떤 이론이 증명된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하더라도 나중에 언제고 과학 자체에 의해 수정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과학은 절대적 신뢰성에 대해 논할 때 더 불리한 입장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예로 든 몇가지 자료는 이전에 과학이 오류로 보았던 (성서에 담긴)어떤 내용이 과학 자체의 발전으로 인해 나중의 어느 시점에 과학적 사실로 밝혀진 사례들이라고 볼 수 있다.

    35 성서는 과학과 상충되지 않으며, 오히려 과학을 성서의 신뢰성을 검증할 수 있는 하나의 수단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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